아버지와 아들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그다지도 기독교에서 신봉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예수라는 이름 외에는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성경의 구절이 큰 작용을 하는 듯하다.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인데, 감히 어느 인간이 예수라는 구세주의 이름을 가볍게 여길 것인가?
그러나 앞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이름은 다분히 상징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이 믿음이 약하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예를 들어 누구든지 자신의 아버지가 거룩하다고 하여 000이라는 이름을 자손대대로 부른다고 하여 그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호와라는 이름을 안 부른다고 하여 하나님을 불신한다면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은 전부 불신자가 돼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가 전능의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여호와라는 이름을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고 출애굽에서 모세에게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이 기독교(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이조 말엽부터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믿음이 없는 미신의 민족이었단 말인가?
다수의 목사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걸 심심치 않게 보곤 하는데, 그야말로 믿음이 무언지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그들은 말하기를 교회에 안 나가면 ‘불신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자신들이 믿는 대상을 믿지 않을 뿐, 누구나 다 믿음이란 것은 있게 마련이다.
돈을 최고로 믿으면 돈이 신이요, 명예를 그렇게 믿으면 명예가 신이다.
우리민족은 비록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으나,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처럼 전능의 하나님을 믿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이 믿은 하나님은 특정한 이름이 없었다.
사실 하나님은 특정한 이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름은 본래 형상이 있는 대상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슨 형상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모세가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른 것은 다른 민족이 믿는 신과 다르게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가리켜 율법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율법은 몽학선생이어서 어린아이들의 신앙에서 필요한 것이다.
어른이 되면 굳이 그런 율법에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사실 예수가 온 것은 율법 아래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십자가 아래 있는 자’라고 성경에는 기록 하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은 율법에 묶여서 죽어 가는 모든 자들의 마음을 밝게 하여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시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여호와일까? 아니면 임마누엘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의 이름이요, 임마누엘은 민족을 초월한 모든 인류의 아버지의 이름이며, 예수는 맏아들의 이름이다.
예수가 자라서 아버지가 된 이름이 임마누엘이다.
이렇게 말하면 기존 기독교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폄하(貶下)할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육적인 인물로 믿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부닥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여호와도 육적인 하나님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라는 아들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무슨 아들이 있고, 딸이 있는가?
그것은 모두 영적인 아들이요, 딸일 적에 가능한 일인데도 육적인 것으로 믿고 있으니 자가당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다
아들이 없는데, 어찌 아버지의 이름이 있단 말인가?
아들은 예수로부터 출발한다는 건 천하가 다 알면서 어찌하여 아들이 없는 여호와를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주장하는가?
여호와의 증인들이 특히 그런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문자에 얽매인 소경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