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中天地一
9. 人中天地一
‘十으로 끝나는데 끝나는 十이 있다’와 ‘十으로 시작하는데 시작한 十이 있다’는 말의 차이는 무얼까? 천부경의 첫머리는 ‘一로 시작하는데 시작한 一이 없다’였다. 그렇다면 ‘十으로도시작하고, 一로도 시작한다’는 말이 아닌가? 一에서 모든 게 시작한다는 식으로 풀이한 기존의 천부경 해설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혼란스러운 얘기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각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一에도 시종이 있고, 十에도 시종이 있다. 一始는 곧 十從이요, 一終은 곧 十始다. 물의 끝은 불이요, 불의 끝은 물이며, 음의 끝은 양이요, 양의 끝은 음이다. 이처럼 어느 한 쪽이 끝나면 다른 한 쪽은 새로운 시작을 하는데, 이를 가리켜 두미조화(頭尾調和)라고 한다. 앞서 우리는 ‘일시무시일’의 一과 ‘일종무종일’의 一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일종무종일의 一은 人中에서 천지가 하나 된 상태이고, 일시무시일의 一은 아직 人中에서 하나 된 一이 아니다. 人中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곧 ‘온전한 깨달음’을 의미한다. 천지가 아무리 드넓다고 하여도 인간의 의식에서 밝아지지 못하면 그저 빈 껍데기일 따름이다. 천지는 무심코 자연의 법칙에 의해 운행할 따름이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물론 짐승이나 식물들도 대자연을 이용하지만, 인간처럼 ‘活用’을 하는 건 아니다. ‘利用’은 ‘자신이 필요해서 쓰는 것‘이지만, ’活用’은 ‘기능을 찾아내서 쓰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용은 살아 있는 것이요, 활용은 살려 주는 것’이다. 살려 주는 일은 깨달음에서 나온다. 짐승이나 식물들이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일시무시일’의 一은 ‘이용’이요, ‘일종무종일’의 一은 ‘활용’이다.
‘人中天地一’은 사람의 의식 속에서 천지가 하나 된 상태이며, 그것은 천지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말이다. 천지를 깨달았다면 도대체 어떤 상태를 말할까? 하늘은 무형의 造化를 하며, 땅은 유형의 敎化를 하고, 사람은 이 둘을 합한 治化를 한다. 造花는 무형의 진리를 깨달은 것인데, 아직 구체적인 형상으로 드러난 건 아니다. 조화의 造는 告(알릴 고, 고할 고)와 辶(갈 착)을 합한 형성(形聲)문자다. 告는 牛와 口가 합한 글자인데, 날카로운 쇠뿔에 행여 사람이 다칠까봐 뿔 위에 횡목(橫木)을 덧붙인데서 유래한 글자다. 날카로운 쇠뿔이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다는 의미에서 ‘알리다, 고하다’는 뜻으로 쓴다. 이처럼 造化는 주로 무형적인 깨달음을 통해 변화를 가져다 준다. 이에 반해서 敎化는 구체적인 물형이나 움직임을 통해서 변화를 유도한다. 敎化의 敎는 爻(효 효)와 子와 攵(칠 복, 두드릴 복)이 합한 글자다. 爻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본받는 것이고, 攵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가르치며 때리는 것이므로 결국 敎에는 ‘가르쳐서 본 받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爻는 팔괘를 구성하는 6효의 음효와 양효가 서로 엇갈린 상태를 본 뜬 상형문자다. 음과 양이 엇갈려 다양한 상태를 나타내는 게 천지대자연이요, 그것을 본받게 하는 것이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해서 나온 글자다. 이처럼 조화는 하늘의 무형적인 것이라면, 교화는 그것을 본받아 구체적인 형상이나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데, 이것을 가리켜 言行이라 한다. 治化의 治는 水와 台로 이루어지는데, 台는 ‘나 이, 기쁠 이, 기를 이’와 ‘별 이름 태’, ‘늙을 대’의 세 가지 음이 있다. 그 중에서 治는 하도, 낙서, 용담이라는 三水로 ‘기쁘게 키운다’는 뜻이니, 이게 곧 ‘다스림’이다.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늘의 뜻을 깨닫는 조화와, 그것을 구체적인 언행으로 옮기는 교화를 함께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人中天地一’이다. 인중에서 천지가 하나 되면 무한한 경지에 이르므로 ‘無終一‘이라고 하였다.
이걸 숫자를 통해 알아보면 더욱 간단하다.
하늘의 조화(9단계) : 0 - 1 - 2 - 3 - 4 - 5 - 6 - 7 - 8 : 하도
땅의 교화(9단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낙서
사람의 치화(9단계)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용담
하늘은 무형에서 출발하므로 0에서 시작하고 9변을 하므로 8까지 이르고, 땅은 유형에서 출발하므로 1에서 시작하여 9에 이르며, 사람은 유, 무형 둘을 합한 남, 녀로 출발하므로 2에서 시작하여 10에 이른다. 十은 0의 완성이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9변(九變)이 아닌, 9복(九復)이라 한다. 따라서 치화는 ‘구복’을 가리킨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다물(多勿)이나 복본(復本)은 사실 구복을 가리키는 것이니, 단군의 이념을 ‘人中天地一’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천지를 깨닫는다 함은, 천지의 실상을 안다는 것이다. 천지의 합작품이 인간이므로 결국 천지를 깨달으면 인간을 알게 마련이다. 진리는 항상 제일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는데, 그곳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알면 온 천하를 얻을 수 있으며, 반대로 자신을 잃으면 천하를 얻은들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은 천부경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알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그렇다면 천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은 천부경과 지부경을 동시에 파악하면 볼 수 있다.
천부경의 말미에 ‘一終無終一’이라고 했는데, 과연 ‘終一’은 어떤 상태를 가리킬까? ‘一始無始一’에서 ‘一始’의 一과 ‘始一’의 一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一終無終一’에서도 ‘一終’과 ‘終一’은 서로 달라야 한다. ‘一始’의 一은 1이요, ‘始一’의 一은 0이다. 즉 ‘一始’의 一은 낙서의 시작을 가리키고, ‘始一’의 一은 하도의 시작을 가리킨다. ‘一終’의 一은 천지가 합한 상태이므로 인간의 시작인 동시에 용담의 시작을 알리는 二다. 그렇다면 ‘終一’의 一은 무얼 말할까? 2에서 시작하면 10에서 끝이 난다. 10은 0의 완성이므로 9복이라고 한다 함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2에서 시작했으므로 당연히 그 마지막은 十인데도, ‘一終無終一’이라고 한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는 곧 十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므로 ‘終一’의 一은 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