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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이화

영부, 精山 2010. 6. 21. 06:14

이때의 무위이화는 노자가 말한 무위이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걸세.

노자의 무위이화는 인위적(人爲的)인 것을 배격하라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억지로 사물을 바라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라는 뜻이니까, 사실은 수운 선생의 ‘天主造化之迹’과 같은 의미라는 걸 알 수 있지.

다만 노자는 무위이화를 ‘한울님’이라는 인격체로 표현하지 않았으나 수운은 인격체로 표현했다는 게 차이점일세.”

“그런 인격적인 신이라면 기독교의 여호와가 있지 않나요?

“물론 그렇지. 그렇다면 기독교의 창조주와 한울님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전에 내가 말하기를 우리민족은 하느님의 이름을 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 걸 기억하고 있나?

그냥 예로부터 ‘上帝’님이라고만 했지, 여호와나 시바, 알라 같은 고유명사를 붙인 적은 없었어.

이처럼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무얼 말할까?

제대로 얘기한다면 하나님은 인격(人格)은 물론, 천격(天格)도 있고, 물격(物格 = 地格)도 있는 법이지.

이것을 동학에서는 삼경사상이라고 하지.

이런 걸로 미루어 볼 적에, 우리 민족도 기독교와 같은 인격적인 신을 믿은 것이 틀림이 없는데, 문제는 인간이 그와 같은 차원으로 변화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느냐, 불가능하다고 믿느냐 하는 데에 있었다네.

기독교는 피조물인 인간은 절대로 창조주인 여호와 유일신과 같은 차원으로 되는 건 신성모독이며 죄악을 짓는 일이라고 한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하지만 동학의 한울님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주종적인 관계가 아니라 한 몸과 한 핏줄로 이루어진 부자지간(父子之間)이라고 본 게 다르다네.

하긴 예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부자지간으로 보았는데, 아직까지도 기독교는 그런 건 외면하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원(二元)적인 관계로 보고 있으니 결국 성경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셈이지.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할 것 같으면, 천도와 천덕을 밝혀내신 분들을 성인이라고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이 추구한 성인과 현인은 천지의 도수에 밝은 것이 첫째 조건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아는 것은 천지의 도수에 정통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민족보다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기에, 서학인 천주교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으며, 그래서 굳이 동학을 창도하게 되었다는 걸 유념해야 할 걸세.

포덕문의 첫 구절부터 ”春秋迭代 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 天主造化之迹“이라고 한 점이 그런 걸 잘 보여주고 있는 걸세.

증산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수운 선생은 이미 천지도수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었으며, 개벽주인 증산께서는 천지도수로 개벽을 단행하였으니 어찌 서로 다른 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무위이화에 대한 의미는 논학문에 자상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건 ‘曰吾道無爲而化矣’ 라고 직접 친필로 수운 선생께서 기록을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우리 도는 무위이화니라’고 하였으니 앞에서 무위이화가 아니라고 한 것과는 정반대라는 걸 알 수 있을 걸세.

무위이화의 정의는 ‘守其心正其氣 率其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也 -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나는 것’이라고 논학문에는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사항이지.

그런데도 수운선생은 굳이 당시 사람들이 ‘無爲而化’로 살아간다고 개탄한 걸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