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중노소문답가 3
3 십삭(十朔)이 이미 되매 일일(一日)은 집 가운데
운무(雲霧)가 자욱하며 내금강(內金剛) 외금강(外金剛)이
두세 번 진동(震動)할 때 홀연(忽然)히 산기(産氣)있어
아들 아기 탄생(誕生)하니 기남자(奇男子) 아닐런가
얼굴은 관옥(冠玉)이오 풍채(風采)는 두목지(杜牧之)라
그러그러 지내나니 오륙세(五六歲) 되었더라
팔세(八歲)에 입학(入學)해서 허다(許多)한 만권시서(萬卷詩書)
무불통지(無不通知) 하여내니 생이지지(生而知之) 방불(彷彿)하다
십세(十歲)를 지내나니 총명(聰明)은 사광(師曠)이오
지국(智局)이 비범(非凡)하고 재기(才器) 과인(過人)하니
평생(平生)에 하는 근심 효박(淆薄)한 이 세상에
군불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과 부불부(父不父) 자부자(子不子)를
주소간(晝宵間) 탄식(歎息)하니 울울(鬱鬱)한 그 회포(懷抱)는
흉중(胸中)에 가득 하되 아는 사람 전혀 없어
처자산업(妻子産業) 다 버리고 팔도강산(八道江山) 다 밟아서
인심풍속(人心風俗) 살펴보니 무가내(無可奈)라 할 길 없네
우습다 세상 사람 불고천명(不顧天命) 아닐런가
(풀이)
내금강, 외금강이 진동한다고 한 것은, 장차 경신, 신유년에 수운 선생이 득도할 것을 미리 알려 주는 건 아니었을까? 풍채가 두목지라고 하였는데, 두목지는 당나라의 시인이다. 그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름은 牧이요, 字는 牧之이며 호는 번천(樊川)이고, 당나라의 경조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才名이 있었다. 시성인 두보를 대두라 하고, 두목지를 소두라 부를만큼 대단한 당나라의 시인이다’고 하였다. 총명은 사광.(師曠)이라고 했는데, 사광은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의 악사(樂師)로서 음률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운 선생이 어느 정도 시대에 눈을 뜨니 세상 사람들이 천명을 외면한 채, 임금다운 임금도 없고, 신하다운 신하도 없으며, 아비다운 아비도 없고, 자식다운 자식도 없는 것을 밤낮으로 탄식하였다.
사광(師曠)
춘추 전기 때 당진(唐晉)의 궁정 음악가이다. 자(字)는 우야(于野)이고 당진의 도공(悼公 : 재위 전572-558), 평공(平公 : 기원전 557-532) 밑에서 태사(太師)의 직을 지냈다. 일찍이 도공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인의(仁義) 뿐이라고 설파하고 군주의 길은 청정무위(淸淨無爲)와 박애(博愛)하는 마음으로 현인(賢人)을 임용하여 정치에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음악을 배우다가 음율에 통하지 못한 것은 주위에 보이는 사물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쑥을 태워 그 연기를 눈에 쪼여 장님에 되었다. 그 결과 음률에 정통하게 되어 음악의 명인이 되었다. 평공 때 위(衛)나라의 영공(靈公)과 함께 당진국을 방문한 태사 사연(師涓)이 복수(濮水)를 건너다 우연히 듣게 된 새로운 곡조의 노래를 연주했다. 사광이 듣고 즉시 그 노래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 때 사연(師延)이라는 악사(樂士)가 작곡한 망국의 노래라는 것을 알았다. <양춘(陽春)>, <백설(白雪)>이라는 거문고를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사기사전)
다음은 열국연의 (www.yeolkook.net) 테마연의를 옮겼다. 제후의 군사들 행렬이 축아(祝阿)에 이르러 제후들에게 주연을 베풀었을 때 평공은 초나라의 군사들과 싸우는 것을 매우 걱정하여 제후들과 술을 마실 때에도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사광(師曠)이 곁에 있다가 말했다.
“ 신이 초나라와의 싸움에 대한 길흉을 노래 소리로 한번 점을 쳐보겠습니다.”
사광이 즉시 남풍(南風)에 이어 다시 북풍(北風)을 연주하였다. 북풍의 음악 소리는 평화롭고 듣기가 좋았으나 남풍의 소리는 마치 죽은 소리와 같아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광이 연주를 끝내고 평공에게 말했다.
"남풍은 앞으로 잘 나가지 못하고 그 소리가 거의 죽는 듯 하여 이것은 스스로 화를 취할 형상입니다. 삼일 내에 마땅히 좋을 일이 있을 것입니다."
사광이라는 사람은 자는 자야(子野)라 했는데 그는 곧 사리(事理)에 밝기는 당진의 제일 가는 인사였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심취하여 열심히 하였으나 깨우칠 수가 없어 사광이 한탄하였다.
“ 음악에 아직도 정통하지 못한 것은 내가 마음속에 너무나 많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이 많기 때문이리라!”
그는 즉시 쑥잎을 태워 그 연기를 두 눈에 쬐여 멀게 한 다음 음악에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천기(天氣)의 차고 비는 이치를 능히 살필 수 있게 되었고 음양의 일어나고 없어지는 이치와 하늘의 일이건 인간사이건 모두 밝게 되어 점을 한번 치게 되면 추호도 오차가 없었다. 풍각(風角)과 새 울음소리로 점을 쳐서 그 길흉을 마치 손금 읽어 내듯이 알아 맞췄다. 후에 당진(唐晉)의 태사(太師)로 임명되어 음악을 관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도 평공이 사광을 매우 신임을 했던 관계로 평공이 전투에 나가면 반드시 데리고 다녔다. ―
평공은 사광의 말을 듣고 일단은 군사들에게 영채를 세워 기다리게 하고 사람을 시켜 멀리까지 나가 정탐을 해 오게 하였다. 삼일이 채 못되어 정탐을 하러 나갔던 사람이 정나라 대부 공손채(公孫蠆)와 같이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 초나라 군사들은 이미 물러 갔읍니다. ”
평공은 초나라 군사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물러간 연유를 물었다. 공손채가 대답했다.
“ 초나라는 공자정(公子貞) 대신에 공자오(公子午)가 영윤이 된 이후로 선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정 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저희 나라의 공자가(公子嘉)가 아무도 몰래 초나라와 내통한 후에 초나라 병사들이 쳐들어오면 초군을 막으러 간다 하고 성밖으로 나가 만나기로 약조하였습니다. 공손사지(公孫舍之)와 공손하(公孫夏) 두 분께서 공자가의 음모를 미리 알고 갑사를 동원하여 성문의 출입을 엄중하게 통제한 결과 공자가는 감히 성밖으로 나가 초병들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공자오가 영수(潁水)를 건넜으나 정나라로부터 내응 한다는 소식이 없자 즉시 어치산(魚齒山) 밑에 진채를 세워 둔병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큰 우박이 몇 일 동안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자 초나라 진영은 한자도 넘게 물이 차게 되었습니다.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가 높은 언덕을 찾아 기어올라 빗물을 피하고자 했으나 추위가 극심하게 와서 태반이 얼어죽게 되었습니다. 사졸들의 원성이 자자하게 되어 군심이 흉흉하게 되자 공자오는 할 수 없이 군사들을 돌려 돌아갔습니다. 저희 군주께서는 공자가의 죄를 물어 이미 처형을 하고 상국과 여러 제후국들의 군사들에게 번거러움을 끼치게 될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저로 하여금 밤낮으로 달리게 하여 군주 님께 고하게 한 것입니다. ”
평공이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 자야(子野)는 진실로 음률에 통달한 사람이로다!”
즉시 초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하러 왔다가 아무런 공도 이루지 못하고 회군하였다고 제후들에게 알리고 각기 자기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사신이 시를 지어 사광이 음률에 통달한 것을 찬양하였다.
歌罷南風又北風(가파남풍우북풍) 남풍의 노래가 끝나자 다시 북풍을 불러 便知兩國吉和凶(편지양국길화흉) 남북 양국의 길흉을 손금 보듯이 알았다. 音當精處通天地(음당정처통천지) 음률에 정통하여 천지의 조화를 꿰뚫고 있었지만 師曠從來時瞽宗(사광종래시고종) 사광은 원래 장님들의 대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