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에세이 - 空과 虛
공(空)과 허(虛)의 차이
공과 허는 다 같이 ‘비었다’는 뜻이다. 두 낱말을 합해서 ‘공허(空虛)’라는 용어가 생겼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둘이 같은 것이라면 굳이 다른 문자를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 아닌가?
空에 대해서는 ‘자랑스러운 공항인’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니, 이번에는 ‘虛(빌 허)’에 대한 것을 살펴보자. 虛는 虍(호피 무늬 호 : 호랑이 가죽무늬) 밑에 丘(언덕 구, 무덤 구)가 합한 글자다. ‘허’는 ‘호’가 변하여 생긴 음이다. 丘는 본래 北 밑에 一을 붙인 글자다. 一은 평평한 대지를 가리키는데, 거기에 우뚝 솟은 곳이 북방이라는 뜻이 있다. 평평한 인생살이에서 가장 힘든 곳이 북방이다. 북방은 어둡고, 차가운 水로 상징되는 곳이다. 동방은 씨앗을 뿌려 자라게 하는 봄을 가리키며, 남방은 뜨거운 열기로 만개하게 하는 여름을 가리키고, 서방은 숙살의 기운으로 추수를 하는 가을을 가리키며, 북방은 모든 것을 다 죽음으로 몰아넣어 새로운 부활을 준비하는 겨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생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북방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장벽이요, ‘큰 언덕’이므로 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왜 虍자 밑에 丘를 넣었을까 하는 점이다. 虍는 호랑이를 가리킨다. 호랑이하고 ‘빌 허’하고 무슨 상관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호랑이는 백수(百獸)의 왕이라고 할 정도로, 위세와 위엄을 상징하는데 그게 ‘빌 허’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런 이치를 올바로 깨닫는다면 그는 이미 우리민족의 이념인 ‘개벽(開闢)’에 상당한 눈을 뜬 사람이다.
호랑이는 밤의 제왕이다. 밤은 어둡다. 그것은 무지(無智)를 상징한다. 즉 호랑이는 위엄의 상징인 반면에 무지의 상징이다. 無智는 ‘깨달음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깨달음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상태’이므로 태양을 가리킨다. 밤에는 태양이 사라지고 대신 달이 천지를 주관한다. 달에도 빛이 있다. 그러나 그 빛은 사실 ‘태양의 볕’이다. 달은 태양 볕을 반사하기 때문에 지식(知識)을 의미한다. 지혜(智慧)는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산하지만, 지식은 지혜를 반조(返照)한다. 그러기에 달빛은 지식이라고 한다. 지식은 공부를 어느 정도 하면 누구나 쉽게 달통할 수 있으나, 지혜는 직관(直觀)으로 통한다.
사람들이 태양보다 달을 더 친근하게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태양처럼 너무 밝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기 때문이다. 은은하면서도 부드럽고 달뜨지 않으면서 서늘한 느낌을 주는 게 달이다. 물론 태양이 더 큰 위력을 지녔으나 대하기는 달이 더 편하다. 그것은 마치 가정에서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품이 더 포근한 것과 같은 이치다. 지혜에 통달하면 모든 물질적인 욕심들을 다 태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모든 것들은 사실 뜬구름과 같은 허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속적인 것들을 태워서 없앤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기에 사람들은 적당히 속세와 타협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많이 배운 사람들’이 출세를 하게 마련이다. 지혜보다 지식에 더 익숙해진 이유는 바로 이런 데에 있다.
호랑이는 어두운 세상을 지배한다. 즉 호랑이는 지혜가 아닌 지식과 무력, 명예와 권세 등 속물적인 힘의 으뜸을 상징한다.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1년 열 두 달의 첫머리(正月)를 寅月(인월 : 호랑이 달)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民畵(민화)를 보면 호랑이가 동산에 올라가 달을 보고 고개를 쳐들고 포효(咆哮)하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호랑이가 12개월의 첫 달을 물고 나온다는 걸 일러준다.
虍와 丘를 합하여 虛라고 한 이유를 이제는 파악할 수 있는가? 호랑이는 12달의 첫머리 정월을 물고 나오는데, 그것과 丘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丘는 북방의 높은 산을 가리킨다고 하였는데, 그것과 호랑이 즉, 인월(寅月)을 연관시켜 보자. 인월은 정월인데, 방위로는 동방의 시초에 해당한다. 해월(亥月 : 10월), 자월(子月 : 11월), 축월(丑月 : 12월)의 3개월은 북방에 해당한다. 자, 이쯤 되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히질 않는가?
동방에서 첫 달을 물고 나오는 봄의 호랑이!, 그 호랑이가 품고 있는 북방의 언덕! - 이것은 호랑이로 상징되는 물질문명의 위엄과 부귀영화는 결국 북방의 무덤으로 사라진다는 의미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빈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空과 虛는 어떻게 다를까? 空은 하늘의 입장에서 본 것이요, 虛는 땅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들자면 공상과 허상을 들 수 있다. 공상(空想)은 ‘생각’을 가리키고, 허상(虛像)은 ‘형상’을 가리킨다. 空은 비록 형체는 없으나 진실 된 것을 가리키는데 비해, 虛는 애초부터 진실 된 것이 아니었다. 像(형상 상)에는 실상(實像)과 허상(虛像)이 있는데, 空은 실상이요, 虛는 허상이다. 空에서는 일체의 형상이 있을 수 없으나, 허상은 형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즉, 空은 일체의 변동이 없으나 虛에는 항상 변화가 발생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고 했지, 일체개허(一切皆虛)라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