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근재 천국사(近思近在天國事)
36. 근사근재 천국사(近思近在天國事)
해자축 무극운(亥子丑無極運)은 사오미궁 조림(巳午未宮照臨)이요
인묘진 태극운(寅卯辰太極運)은 신유술궁 조림(申酉戌宮照臨)이니
동절춘절 조림처(冬節春節照臨處)를 하추방(夏秋方)에 살펴보고
사오미 황극운(巳午未皇極運)이 해자축궁 조림(亥子丑宮照臨)인줄
정정방방(正正方方) 깨달아서 원불구이 수아(遠不求而修我)하면
근사근재 천국사(近思近在天國事)를 어찌해서 못 깨칠꼬.
(풀이)
개벽이 된 세상은 완전히 방위가 바뀌게 마련이다. 세상에서는 桑田碧海(상전벽해)가 마치 개벽인 것처럼 말들을 하고 있으나, 진정한 개벽은 의식의 개벽이다. 의식의 개벽은 시간과 공간, 음양의 개벽이다. 이런 것들이 변화하면 사물을 바라보고 활용하는 시각과 방편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모든 걸 황금만능으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시각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을 이루는 게 바로 진정한 개벽이다. 북방에 있던 해자축은 남방의 사오미로 들어가고, 동방에 있던 인묘진은 서방의 신유술로 바뀌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하는데, 단순한 방위만 바뀌는 게 아니라 음양과 상생, 상극, 시간 까지 모두 포함된다.
해자축은 북방이기에 모든 걸 죽음으로 돌리는 십무극의 운에 해당하였는데, 그것이 남방의 화기가 충만한 사오미궁에 들어와 빛을 발한다. 무극운은 天三月이요, 태극운은 地三月이며, 황극운은 人三月이다. 무극운은 선도요, 태극운은 불도이며, 황극운은 유도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이치를 멀리에서 찾지 말고 자신을 닦으면(遠不求而修我) 천국의 모든 일을 가까이 생각하고 가까이 있게 된다. 진리는 결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곳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이다. 내 마음에서 무극, 태극, 황극의 이치가 밝혀지면 천국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성경에도 이르기를 ‘천국은 여기 있고, 저기 있는 게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만, 그들은 예수라는 특정인을 믿어서 간다고 하는데 반해 봉명서에서는 5행6갑의 이치, 즉 천도지덕의 이치가 마음에 밝혀지면 저절로 된다고 하는 게 다를 뿐이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된 자 -獨生子’를 가리킨 것이요, 그것은 곧 ‘진리로 마음이 밝아진 자, 진리의 생활화를 이룬 자’다. 다만 성경에서는 진리를 추상적인 ‘말씀’으로 摘示(적시)한데 반해 이 글에서는 5행6갑이라고 한 점이 다르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류가 살아났다는 代贖(대속)은 곧, 누구나 자신의 肉身(육신 : 육적인 몸, 곧 율법이나 물질적인 생각)을 십자가에 죽이지 않으면 法身(법신) : 하느님의 형상)으로 거듭나지 못한다는 걸 가리킨 것이므로 자신의 옛 생명으로 새 생명을 대속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즉 예수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니 이것이 遠不求而修我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특정한 신을 믿어야 운전을 잘 하는 건 아니다. 믿음에 상관이 없이 운전하는 실력과 자동차의 성능이나 구조를 잘 알고 적당한 여건을 갖추고 교통법규를 준수하기만 하면 잘 나가게 되어 있다. 즉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앎과 능력‘이 먼저다. 앎과 능력을 가리켜 ’지능‘이라 하는데, ’全知全能‘한 존재가 바로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성경의 로마서에도 이르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으니, 믿음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믿음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요소일 뿐, 결코 목적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말씀‘이요, 이는 곧 ’육신을 죽인 자‘의 말씀이니 육신을 죽여 온전히 육신의 형상에서 벗어난 무형의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런 면에서 5행6갑과 같은 깨달음의 열매는 더 없이 귀중한 것이 아닌가? 5행6갑의 이치를 깨달으면 오장육부의 이치가 훤해지고, 결과적으로 영육 간의 평안과 건강을 도모할 수 있으니 어찌 영생의 말씀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리오! 이렇게 살아가면 반드시 천국이 가까운 법이니 ’遠不求而修我近思近在天國事‘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