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할머니의 기부
이름 없는 할머니의 기부
지난달 3일 오후 연세대 공학원에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들어섰다.
길거리에서 파는 허름한 꽃무늬 셔츠에 검정 치마 차림,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뽀글이 파마' 를 했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 검버섯이 몇 개 보였다.
동네 마실 나온 60대 시골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교직원 한 사람이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느냐"
고 물었지만 할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뒤 할머니가 조그맣게 말했다.
"돈을 좀 내러 왔는데, 1년 전에도 한 번 와서
돈을 조금 내놓은 적이 있어요."
교직원은 장학금 기부를 담당하는 대학본부
대외협력처로 급히 연락했다.
엄태진(45) 대외협력처 부국장이 전화 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와 할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지난해 4월, 1억원이 든 봉투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진 바로 그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당시 정 할머니는 자신이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는
질문에 '정씨' 라고만 했었다. 귀한 뜻을
어디에 쓰면 좋겠다는 기부 약정서도,
기부금을 건넸다는 영수증도 다 필요 없다며
서둘러 자리를 뜨는 할머니에게 엄 부국장은
"꼭 한 번 연락을 달라"며 명함을 건넸었다.
정 할머니는 "기억해 줘서 고맙다" 며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은 첫 만남 때보다 핼쓱했다.
잔주름도 부쩍 늘어 있었다.
"따뜻한 녹차 한잔 하시죠." 엄부국장이
사무실 한쪽 작은 방으로 할머니를 안내했다.
"안부 인사 드리고 싶었지만 연락처가 없어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다 늙은 사람 안부는 물어 뭐해요."
정 할머니가 팔목에 끼고 있던 검정 비닐봉지를 뒤적였다.
빳빳한 새 수표 몇 장이 나왔다.
1000만원짜리 2장, 500만원짜리 1장, 100만원짜리 5장.
모두 3000만원이었다.
"이번에도 조금밖에 안 돼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써 주세요.
외부에는 알리지 말고…."
찻잔을 앞에 두고 10분을 함께 앉아 있었지만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거의 없었다.
왜 또 큰돈을 내놓게 됐는지,
연세대와의 인연을 묻는 엄 부국장에게
정 할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작년 연세대에 1억원을 기부할 때 할머니는
"그동안 살던 곳이 재개발되면서 받은
토지보상금" 이라며 "자식 셋은 대학
공부는커녕 밥도 제때 못 먹였지만
연세대 학생들이 이 돈으로 열심히 공부하면
좋겠다" 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이번에는
성함과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 고
간곡히 부탁하는 엄 부국장에게 "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 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로 집까지 모셔 드리겠다" 고 해도
정 할머니는 "괜찮다" 며 고개를 저었다.
"버스정류장까지만이라도 배웅하겠다" 고
엄 부국장이 나서자
"바쁠 텐데 무슨 배웅" 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공학관에서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3000만원을 쾌척하고 돌아가는 정 할머니는
허름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파주행
버스에 오른 할머니는 "어여 들어가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