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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耳東風

영부, 精山 2011. 7. 26. 09:48

馬耳東風에 대한 답변

 

금강산인께서 ‘우리’님이 올리신 마이동풍에 대한 저의 견해를 물으셨는데, 글쎄요 ... 글에 대해서 왈가왈부 한다는 것 자체가 괜한 시비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심스럽군요. 그러나 금강산인님의 질문에 분명 뭔가 가볍지 않은 뜻이 있는 것 같아 다음과 같은 제 견해를 披瀝(피력)하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 최초의 반항연대

 

먼저 ‘우리’님이 올리신 글을 그대로 轉載(전재)하고, 다음에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뜻을 소개한 후에, 제 견해를 피력하는 순서로 하겠습니다.

 

1, ‘우리’님의 글

 

우리의 밝달임금(檀君)의 도읍지 아사달 > 앗달에서 최초로 세운 나라 아사선 > 앗선(朝鮮)은 하느님의 교훈 [진본 천부경] 때문에 인류 역사상 있을 수 없는 2 천여간이나 잘 지냈으나 말년에 가서는 중국이나 섬기는 미친 선비들 때문에 한(漢)나라 에게 나라를 내 주었고 밝달임금의 도를 따르던 우리 유민들을 압박한 것은 그 지나인인 한나라 사람들 보다 그 한나라에서 빌붙어 먹고 살던 선비들 이었다.

 

따라서 그 유민들 일부는 밝달임금의 도에서 배운대로 풍각쟁이 남사당패 무당 등으로 유리걸식 하게 되었고 대개는 한나라 군사에게 끌려가 쇠 광산, 또는 채석장 등에서 중노동을 하였다.

 

이때 동쪽 마한 땅에서 밝은 이(주몽 朱蒙)이 옛 밝달임금의 앗선을 다물(多勿 회복)하여 고구려를 세우려 함으로 나라를 잃은 노예들은 아무리 한나라 군졸들이 채찍으로 때릴망정 못 들은 체 하고 오직 고구려에서 들려오는 다물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있었다.

 

따라서 한나라에서는 이들을 마한(馬韓)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듣는다는 '마이동퐁(馬耳東風)'이라 비아냥거렸고, 이 눈물 나는 말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그 뜻도 모르는, 아니 알면서도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는 우리 선비들은 중국인들이 만든 마이동풍 이란 사자 성어를 즐겨 쓰며 유식한 체 하고 있다.

 

이 마이동풍을 하던 앗선 유민은 오직 밝은 이(주몽)의 다물 정책으로 나라를 회복한다는 말에 귀를 귀울였던 사람들이니, 요즘 어느 당의 누가 정권을 잡았건, 나라야 되건 말건, 아무 경우도 없이 정부에서 한다면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선비들, 정치가 선동에 뇌하부동 하는 반항연대와는 다른 내 나라를 찾겠다는 반항자 들이었다.

 

 

 

‘우리’님은 예전의 우리 글을 해독하는 독특한 실력으로 천부경을 비롯한 많은 조상들의 뜻을 밝히는 데에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천부동에도 많은 글을 올리시는데, 죄송하지만 그 타당성이나 眞僞(진위)를 논하기 전에 맞춤법이나 문맥 등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의 문장만 보아도 1. <밝달임금>은 ‘밝달 임금’으로 써야 하고, 2, <2 천여간>은 ‘2,000천여 년 간‘이나, ’이천여 년 간‘으로 써야 하며, 3, <한(漢)나라 에게>는 ’한나라에게‘로 붙여서 써야 하고, 4, <선비들 이었다>도 역시 붙여 쓰기를 해야 하며, 5, <배운대로>는 ’배운 대로‘로 띄어써야 하고, 6,<풍각쟁이 남사당패 무당>은 ’풍각쟁이, 남사당패, 무당‘으로 점을 넣어야 하며, 7,<유리걸식 하게 되었고>는 ’유리걸식하게 되었고‘라고 붙여 써야 하고, 8, <때릴망정>은 ’때려서 매를 맞을지언정으로 고쳐야 하며, 9,<못 들은 체 하고>는 ‘못들은 체 하고>로 써야 하고, 10, <귀울였던>은 ’기울었던‘으로 고쳐야 하며, 11, <뇌하부동>은 ’부화뇌동‘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한자를 중국 글자라고 하면서 폄하하는 분이 어째서 간략한 문장 하나에도 저렇듯 많은 오자와 탈자를 쓰고 있는지 의아합니다.

 

그건 그렇고, ‘마이동풍’을 <마한(馬韓)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듣는다>는 식으로 풀이한 것은 개인적으로야 무관하겠지만, 역사적이나 사실적으로는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2. 사전의 풀이

 

본래 ‘마이동풍’은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따뜻한 봄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기뻐하는데 말의 귀는 봄바람이 불어도 전혀 느끼는 낌새가 없다는 뜻>이라고 하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비슷한 속담으로 '쇠귀에 경 읽기'와 같은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 出典(출전)은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李白)의 《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라는 시에 있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왕십이(王十二)가 이백에게 보낸 '한야에 홀로 술잔을 들며 수심에 잠긴다'고 한 시에 이백이 답하여 쓴 시에서,

“세인문차개도두(世人聞此皆掉頭 ; 세상사람들은 우리가 지은 시부(詩賦)를 들어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들으려 하지 않음이) 유여동풍사마이(有如東風射馬耳;마치 봄바람이 말의 귀에 부는 것과 같다)”

고 한 데에서 나온 문구입니다.

 

이백은 이 시에서 왕십이 자신이 불우하여 하소연할 곳도 없이 쓸쓸히 지내고 있음을 생각하여 술을 마시되 만고(萬古)의 시름을 씻어 버릴 것을 권하고, 부박(浮薄)한 세상을 한탄하여 왕후(王侯) 사이에서 즐기는 투계(鬪鷄)의 기술을 익혀 그들의 귀여움을 받아 출세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변경의 싸움에서 작은 공을 세웠다고 마치 충신이나 된 양 날뛰는 세상이니 고매한 인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음이 당연하다고 위로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북창(北窓)에 기대어 시부를 짓는 정도인데 세인은 이를 들으려 하지 않고 마이동풍일 뿐이니, 오직 시부를 짓기에만 힘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격려하여 이 시의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마이동풍은 마한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오랫동안 우리조상들은 시를 지을 적에 즐겨 사용했던 문구입니다.

 

3. 저의 견해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마이동풍은 남방의 말과 동풍과의 관계를 연결시켜서 용담도의 관점으로 보고 싶군요. 남방의 말은 12지지의 午인데, 그것은 후천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午는 비록 남방에 있으나 선천과 후천을 놓고 볼 적에 후천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그러기 때문에 午는 其瑞在東의 원칙에 따라 동방으로 午는 이동을 해야 합니다. 말이 西方의 無道에서 벗어나 동방의 有道를 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이동풍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천에서는 그런 말이 귀에 들릴 리가 없지요. 그래서 마이동풍은 무관심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이동풍은 선천에서 후천으로의 개벽에 관한 소식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정산 왕의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