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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개벽주께서는 현무경에 영부(靈符)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천부경의 완성은 현무경의 영부이건만, 사람들은 문자로 된 천부경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81자로 된 한문 천부경은 진짜가 아니고 금문으로 된 16자가 진짜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본래 신선들이 사용하던 符에 근접한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환인께서 환웅에게 전수하신 천부인(天符印)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고운 선생께서 한자를 빌어 천부경을 성편하셨지만, 그 뜻은 고운 선생의 사견(私見)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금문이건, 한자이건 그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느냐, 아니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요? 만약 그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었다면 굳이 그런 걸 따지면서 한자 천부경 자체를 폄하(貶下)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16자 금문이 진짜라고 하여도 그걸 제대로 풀이한 것인지, 아닌 지 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여하튼 가을 문명으로 접어든 지금은 다시 원시반본(元始返本)하는 이치에 따라 ‘符의 문명’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터넷의 등장은 바로 그런 문명을 실현하는 첨병(尖兵)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바로 현무경의 영부를 언급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사실 그건 81자 천부경보다 더 함축적이기 때문에 더 신비하면서 그만큼 난해합니다. 먼저 천부경 81자를 이해한 후에 현무경의 영부를 대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녹도문이 됐건, 한자가 됐건 제대로 그 뜻을 이해하는 게 급선무라고 볼 적에 비교적 널리 알려지고 이해하기 쉬운 한자 81천부경을 교재로 하는 게 더 현실적이며 현명한 방편이라고 봅니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인 천부경 해설로 들어갑니다. 아까 一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를 살펴보았는데, 천부경은 一로 시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부의 시종이 곧 一이라는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一로 시작해서 중심의 六을 통과하여 다시 一로 돌아가는 것이 천부경입니다. 자, 여기에서 질문을 하겠습니다. 시작의 一과 끝나는 一이 같은 건가요? 아니면 다른 건가요?
천부경 해설 글들이 상당히 많은데, 거의가 이 둘을 같은 뜻으로 풀이 했더군요. 예를 들면 ‘하나가 시작하는데 그 시작은 없다’ 또한 ‘하나로 끝나는데 그 끝은 없다’는 식의 풀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우주만물은 시종이 없다고 하는 건, 불교에서 특히 불교의 교리에서는 ‘본래 무일물’이라고 하는 것처럼 일반화 된 상식입니다. 과학계에서도 물질을 한 없이 분석해 나가면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밝힌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다 공으로 돌아가니 집착을 하지 말며, 허욕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으로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천부경도 그런 말씀을 가르친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一始無始一과 一終無終一의 뜻은 그렇게 풀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一始의 一과 一終의 一은 전혀 상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시작과 끝이 똑 같을 수 있나요? 물론 본질적으로는 이 세상 만물은 본래 하나였으니 동일할 수밖에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전혀 다르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자면 갓난아이나 돌아갈 적의 할아버지나 같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그 시작과 끝이 동일하다 할 수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는 증거밖에 안 됩니다. 아니, 처음이니 끝이니 하는 말부터 아예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인데도 천부경을 풀이한 대부분의 글들은 너무 본질적인 면에 치우쳤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풀이에 치우친 결과는 어떨까요? 그것은 기존 종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결국은 허무하게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니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잘 믿어라.’ 혹은 ‘너희가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니 모든 욕심을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해라’ 하는 식으로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에게 자신을 맡기라는 기존 종교의 틀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게 우리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말씀일까요? 전지전능한 신이 계시다면 자신의 모든 자녀에게 자신처럼 전지전능한 상태가 되라고 하면서 그 비법을 모두 알려주려고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요? 우리 조상들은 천부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런 가능성과 비법을 전수해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천부경이 다른 종교나 경전과 다른 차이점입니다. 다른 경전은 모두 엄청난 분량의 문자로 뜻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천부경은 단지 81자의 문구로, 그것도 33개의 숫자와 48개의 문자라는 符를 가지고 하늘의 뜻은 물론, 하늘을 닮은 홍익인간이 되는 방편을 일러주었습니다. 홍익인간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도덕적인 존재만 가리킨 게 아닙니다. 도덕적인 것은 물론이요, 신령스러운 능력까지 갖춘 존재를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신의 형상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모두 갖추도록 하려는 배려에서 천부경이 나온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민족보다 우수하며, 지도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부경의 첫 구절 一始無始一과 끝 구절 一終無終一은 그 뜻이 엄연히 다릅니다. 처음에도 一이요, 끝에도 一이 될 것이라면 무엇 하러 二, 三, 四 등등 여러 가지 숫자가 천부경에 등장할까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一로만 천부경을 지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래야만 처음과 끝이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一의 외형은 같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법입니다. 一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본래 모든 사물의 근원적인 존재를 가리킨다고 본다면, 그 외형이 아닌 내면의 세계를 일러주는 상징적인 하늘의 부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一에서 9까지의 다양한 숫자를 통해 그 실상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외형과 내면은 다릅니다. 그럼, 어떻게 다를까요?
먼저 一始無始一에 대한 생각을 해 봅시다. ‘하나가 시작했는데, 시작한 하나(始一)가 없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냥 ‘하나가 시작했는데 시작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풀이는 ‘一始無始’라고 해야 합니다. 왜 다섯 자로 되어 있는데, 굳이 끝에 있는 一을 생략해 가면서까지 넉 자로 풀이를 해야 한단 말인가요? 다섯 자로 풀이하는 사람들도 역시 無始一을 ‘시작한 하나가 없다’고 풀이를 하면서도 그것은 결국 ‘시작은 없다‘는 뜻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게 대부분의 풀이입니다. 그런 식의 풀이는 넉자로 본 ’一始無始‘나 다섯 자로 본 ’一始無始一‘이나 별 차이가 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분은 저에게 이런 메일을 보내왔더군요. <하늘 말 천부경으로 풀이한 글을 보면 중국식의 어순이 아닌 한국식의 어순으로 풀이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냥 글자가 나열 된 순서대로 풀이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건데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신가요? “一始無始一은 하나가 시작하는데 無에서 시작한 하나다”> 어떤가요? 문자가 배열 된 순서로 그냥 풀이를 하였는데도 문맥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았나요? 이것은 천부경의 맨 마지막도 마찬가지여서 <一終無終一은 하나로 끝나는데 無로 끝나는 一>이라는 식으로 풀이를 하였더군요.
여러분, 이것도 역시 시작과 끝이 없다고 한 게 아닌가요? 중국식이건 한국식이건 뜻이 올바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과연 천부경의 一始無始一과 一終無終一은 一이 무시무종 하다는 걸 가르치는 걸까요? 거기에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함정(陷穽)이 있습니다.
無始一은 ‘시작한 하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에서 모든 것이 시작하지만, 그 시작은 하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코 무시무종한 一을 가리킨 게 아니라, 하나에서 시종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一始나 一終은 하나가 아닌 셋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사물의 시종은 삼극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모이는 과정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이건 아예 시종이 없다는 말과는 전혀 그 뜻이 다른 겁니다.
자, 주먹을 쥔 상태에서 여러분의 검지손가락을 하나 펼쳐보세요. 분명히 검지 하나를 펼쳤죠? 그런데, 그것은 세 마디가 있습니다. 검지 하나로 출발을 하긴 했지만, 그 속에는 셋이 들어 있지요. 그걸 천부경에서는 ‘天一一地一二人一三’이라고 했습니다. 그 셋 중에서 어느 하나가 따로 시작한 건 아니지요. 셋이 동시에 모여서 하나로 시작을 하였으니 어찌 ‘하나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나요? 하나에서 시작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無始一이라고 하는 건 지당한 표현입니다.
무시무종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우주만물은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생겼다는 말이 철칙인 것처럼 여기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과연 아무 것도 없는데서 만물이 생겼을까요? 그런 생각은 많은 종교인들이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진실은 이렇습니다.
<있는 데서 있는 게 나오고, 없는 데서 없는 게 나온다. 즉 무형은 무형을 낳고 유형은 유형을 낳는다>
우리말에 이르기를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형상이 있는 모든 만물이 나온다는 건가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어떻게 우주만물이 나온다는 말인가요? 그런 식의 믿음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천지창조를 하셨다’는 특정 종교의 믿음과 동일한 게 아닌가요? 천부경의 가르침을 그런 식으로 오도(誤導)한다면 어찌 조상들께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실 그런 종교의 경전인 성경에도 그렇게 가르치는 건 아닙니다. 성경에는 명백하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요한복음)>이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즉, 무형은 무형을 낳고, 유형은 유형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사정이 이런 데도 진실은 현실에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지창조는 유형적인 물질로 지은 게 아니라 무형적인 ‘말씀으로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천부경도 마찬가지입니다. 一은 유형적인 걸 가리킨 게 아니라 무형적인 내면의 세계를 가리킨 것인데도 마치 물질적인 우주만물을 가리키는 것처럼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一終無終一도 무형적인 면을 가리킨 겁니다. 하나로 끝나는데 ‘끝나는 一이 없다’는 문자풀이가 되겠군요. 자, 다시 손가락을 봅시다. 아까 펼쳤던 손가락을 이번에는 구부려 봅시다. 몇 개가 구부러지죠? 손가락은 하나이지만, 세 마디가 동시에 구부려지지 않나요? 하나가 아니라 셋이 동시에 구부러져 끝이 나는 법인데, 어찌 하나로 끝이 난다고 할 수 있나요? 그러니 당연히 無終一이라고 할 수밖에 더 있나요?
<一始無始一과 一終無終一>의 뜻이 막연하게 무시무종을 가리킨 게 아니라는 건 이것으로 명백해졌을 겁니다. 그럼, 도대체 이건 어떤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해줄까요? 그건 ‘모든 사물에는 3극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一析三極’이라는 천부경의 문구는 그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사물이건 겉으로만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를 들면, 물을 볼 적에도 ‘차갑다’, 혹은 ‘시원하다’, ‘맑다’는 식으로 보는데 그건 지극히 동물적인 감각입니다. 그런 것은 사물을 형상적인 면으로만 본 것인데, 천부경의 표현을 빌리자만 ‘地一二’라는 한 면만 본 것입니다. 3극의 관점에서 본다면, 물에는 반드시 天一一의 면과 地一二의 면과 人一三의 면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天一一의 관점은 물은 한 곳으로 모이는 속성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늘은 본래 무형이기에 아무런 차등이나 분별이 없이 단일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촘촘하고 단단하게 뭉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地一二의 관점에서 보면 물은 음양이 라는 상반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니, 음적인 요소가 있기에 차갑고 어둡게 보이지만, 반대로 양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물속은 따스하고 투명하게 보인다는 걸 알게 됩니다. 또한 人一三의 관점에서 보면 물속에 들어 있는 천지의 속성을 적재적소에 활용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에서 전기를 얻는다든지, 물을 통해 작물을 재배하며 청소나 밥을 하는 등등, 무수한 활용을 할 수 있습니다. 물에 들어 있는 天一一의 속성을 상징한 것이 一水요, 地一二의 속성을 상징한 것이 六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질들을 활용하는 것이 人一三입니다. 5행에는 모두 이와 같은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런 걸 잘 살필 적에 비로소 온전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